글조각
17.12.19 / ?
배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 급하지 않게. 부드럽게. 세상엔 많은 부드러운 것이 있다. 생크림, 봄날의 햇살, 병아리의 솜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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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 급하지 않게. 부드럽게. 세상엔 많은 부드러운 것이 있다. 생크림, 봄날의 햇살, 병아리의 솜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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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도 않는 과거에 글 쓰는 것을 즐겼던 시기가 있었다. 공책과 볼펜이 갓 사귄 연인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찌 보면 흰 상태의 종이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허나 불변은 없다고 했었나. 가을 잔바람에 낙엽이 흩어지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그 뿌듯한 습관은 사라져 갔다. 이래서는 도무지 매일 일기를 쓰겠다는 그 단순거창한 소망을 이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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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말. ~답다 '너답다', '남자답다', '어른스럽다' 등 존재를 규정짓는 추상적인 굴레가 오늘 이 시간도 어김없이 누군가에게 씌워지고 있다. 이래서는 인간과 가축의 결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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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실 한구석에 오래된 약 포장기가 놓여 있다. 끼익... 끽 환자가 올 때마다 버거운 관절은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는데, 가만히 지켜볼 양 싶으면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할는지 의문이 생기곤 한다. 단지 생명이 없다는 이유로 수많은 나날을 혹사당한 그것.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저 오래된 약 포장기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맹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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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비에 약해질 만큼 약해진 사면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안일한 생각으로 그저 지켜만 보던 이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허탈한 표정이 서려 있다. 손을 쓸 수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무력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음...... 죽을까.' 5년을 넘도록 청춘을 바쳐 이 일에 가장 애정을 보였던 순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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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동 사람들」을 읽고 있다. 참으로 다양한 생활상은 결국 '생존' 혹은 '연명'과 궤를 같이 한다는 마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 번쯤 고민해 볼 문제이다. 아니, 평생을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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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든 하루하루가 의미 있고 알차야 하지? 어째서 낙서로 채워진 공책이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거지? 아무 생각 없이 지내고 싶다. 아-무 고민 없이 아-무 걱정 없이 차라리 돌이라면 좋겠어 그러나 혹시 모르지. 돌도 돌 나름의 걱정과 고민이 있을지. 단지 우리는 그 소리를 느끼지 못할 뿐이고. 만약 사실이라면 지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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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에게 꿈이 있다면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가벼이 죽일 수 있는가 스스로도 찾지 못한 삶의 목적을 행하는 뜻 없는 날갯짓에 심심한 응원을 보낸다. 연둣빛 푸릇한 풀보다는 빛바랜 건초가 좋다 갈색의, 혹은 베이지색의 어떤 것이 좋아서일까? 아니. 그보다는 모든 걸 끝낸 그들이 부러워서겠지 하얗다. 차갑다. 포근하다. 보드랍다. 눈을 느끼는 몇몇의 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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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대해, 그것이 생명체든 무생물이든 추상적 개념이든 어쨌거나 오롯이 책임감 혹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던 적이 있었는가? 그것을 위해 나 스스로를 잊을 만큼 헌신했던 적이 있었는가? 누구에게 내놓아도 자신감 있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만한 때가 있었는가? 인생을 통틀어 열정이란 감정이 존재했었느냐는 말이다. 늘 나에게 주어진 권한과 혜택에만 집중하고 그에 따른 책임으로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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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깊게 의심하게 되면 웬만해서는 빼기가 힘들다. 자리 잡힌 오해만큼 다양한 시나리오가 몇 편씩 완성되어 간다. 결국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자체도 의심하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맞는가? 밀란 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하고, 다투고 그러지. 서로 다른 시간의 시점에 놓인 전망대에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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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는 것과 확신을 가진 발걸음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껏 그저 흐르는 대로 큰 노력 없이 '지내다 보면 무언가 되겠지...' 또는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마치 최소한의 내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인 양 쥐어잡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현 모습이 분명한 목적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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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진리를 찾기 위해서도 그 절반의 두 배를 뛰어넘는 노력을 해야 함에는 틀림이 없는데도 그 절반의 절반도 채 못 미치는 게으름을 언제까지 받아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다만 스스로 정해놓은 틀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러르고 현재의 모습을 기대에 비교하며 자책하고 열등감을 느끼길 지속하는 어리석은 자아입니다. 변화를 추구하되 행동을 두려워하고 성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