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조각
17.12.21 / ?
감정이 현실에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또 다른 감정으로 그것에 응답한다. 서로가 '잘 통한다', 또는 '걸림이 없다'라고 함은 무엇에 의해 판단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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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현실에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또 다른 감정으로 그것에 응답한다. 서로가 '잘 통한다', 또는 '걸림이 없다'라고 함은 무엇에 의해 판단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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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점호엔 연병장에 나간다. 겨울 특유의 늦은 일출 탓에 여전히 떠 있는 별의 잔재. 잠자리에서 미적거리듯 연붉은 빛이 서서히 번지면 나는 연속된 시간의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곤 한다. 구령에 맞춰 체조를 하며 가만히 올려다보니 퍽 잔잔하고 은은하기 그지없다. 그러기도 잠시. 곧이어 찾아오는 냉기에 어디에선가 해를 빌려 올 수는 없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글조각
배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 급하지 않게. 부드럽게. 세상엔 많은 부드러운 것이 있다. 생크림, 봄날의 햇살, 병아리의 솜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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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도 않는 과거에 글 쓰는 것을 즐겼던 시기가 있었다. 공책과 볼펜이 갓 사귄 연인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찌 보면 흰 상태의 종이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허나 불변은 없다고 했었나. 가을 잔바람에 낙엽이 흩어지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그 뿌듯한 습관은 사라져 갔다. 이래서는 도무지 매일 일기를 쓰겠다는 그 단순거창한 소망을 이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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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말. ~답다 '너답다', '남자답다', '어른스럽다' 등 존재를 규정짓는 추상적인 굴레가 오늘 이 시간도 어김없이 누군가에게 씌워지고 있다. 이래서는 인간과 가축의 결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글조각
의무실 한구석에 오래된 약 포장기가 놓여 있다. 끼익... 끽 환자가 올 때마다 버거운 관절은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는데, 가만히 지켜볼 양 싶으면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할는지 의문이 생기곤 한다. 단지 생명이 없다는 이유로 수많은 나날을 혹사당한 그것.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저 오래된 약 포장기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맹목적으로
글조각
계속된 비에 약해질 만큼 약해진 사면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안일한 생각으로 그저 지켜만 보던 이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허탈한 표정이 서려 있다. 손을 쓸 수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무력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음...... 죽을까.' 5년을 넘도록 청춘을 바쳐 이 일에 가장 애정을 보였던 순현은
하루 일기
위통으로 힘들다. 어제 중식으로 먹은 짬뽕이 꽤나 자극적이었는지 지금껏 쓰라림이 줄지를 않는다. 고통 속에서 창작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통증에 집중할수록 머릿속이 하얘진다.
글조각
「원미동 사람들」을 읽고 있다. 참으로 다양한 생활상은 결국 '생존' 혹은 '연명'과 궤를 같이 한다는 마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 번쯤 고민해 볼 문제이다. 아니, 평생을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루 일기
세상 사는 사람들은 왜들 그리 팍팍하게 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이는 내가 아직 세상에 몸을 담그어 보지 않았기 때문인가. 나 또한 속세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소금물에 배추 숨이 죽듯 굴복하게 되려나. 새삼 오지도 않는 수많은 미래에 가슴이 답답한 밤이다.
글조각
왜 모든 하루하루가 의미 있고 알차야 하지? 어째서 낙서로 채워진 공책이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거지? 아무 생각 없이 지내고 싶다. 아-무 고민 없이 아-무 걱정 없이 차라리 돌이라면 좋겠어 그러나 혹시 모르지. 돌도 돌 나름의 걱정과 고민이 있을지. 단지 우리는 그 소리를 느끼지 못할 뿐이고. 만약 사실이라면 지구는
글조각
벌레에게 꿈이 있다면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가벼이 죽일 수 있는가 스스로도 찾지 못한 삶의 목적을 행하는 뜻 없는 날갯짓에 심심한 응원을 보낸다. 연둣빛 푸릇한 풀보다는 빛바랜 건초가 좋다 갈색의, 혹은 베이지색의 어떤 것이 좋아서일까? 아니. 그보다는 모든 걸 끝낸 그들이 부러워서겠지 하얗다. 차갑다. 포근하다. 보드랍다. 눈을 느끼는 몇몇의 감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