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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조각

불안과의 불완전한 안녕 26.03.14 / 20:24

나는 불안합니다. 이 불안은 찰나의 기쁘던 순간들이 정말로 찰나에 그치게 될까 하는 불안입니다. 이 불안은 괜한 짓들로 되려 조심스러워진 지금에서 오는 불안입니다. 이 불안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를 것을 허황되게 담아버린 자신에게 가는 불안입니다. 따라서 이 불안을 놓아주어야겠습니다. 나의 불안이 상대의 행복을 망칠 수는 없기 때문에.

하루 일기

첫 날의 방문지 26.01.01 / 20:32

신정이다. 오후 늦게 일어나 카레에 밥을 비벼 먹고 집을 나섰다. 매서운 추위다. 일전에 독서모임의 누군가 추천을 해준 ‘나바호‘라는 카페에 다녀오는 길이다. 내외부의 모습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나무로 된 건물, 서부시대와 인디언이 떠오르는 장식들. 사람이 많아 대기를 해야 했다. 대부분은 친구들, 연인들인 듯 보였다. 버터크림라떼를 주문하여 시집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글조각

구인 공고 25.10.18 / 23:39

저를 죽여주세요. 스스로 죽기에는 너무나도 겁이 많습니다. 가족들에게 멀쩡한 얼굴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장기기증을 해야 합니다. 꽤나 어렵겠지만 상흔이 없게 부탁드립니다. 요청이 많지요? 당신은 죄가 없습니다. 아무 잘못도 아닙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을 탓하지 말라 글을 남기는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잠시만

하루 일기

가면의 호의 25.10.11 / 22:14

일전의 일이 있었음에도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사회성과 인격의 문제이다 분명히. 모두는 웃고 떠들고 즐거운 분위기이지만 물과 기름이 섞이지 못하는 것처럼 도저히 하나로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다들 만류하지만 그것을 허울 좋은 넉살에 불과하다고 괜히 여긴다.

글조각

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기를 25. 7.16 / 23:42

얼룩이 아른거리는 어지러운 수정체. 활자를 담지 못하는 눈동자. 너는 무엇을 보고 있니. 정말 원하는 것을 보고 있는 거니. 불수의적 움직임에 편승하여 끌려가는 중이니. 두 눈을 후벼파고 맹인으로 살아가면 오히려 나을까. 나의 시선, 나의 의식, 나의 생각 아무리 닦아내어도 도무지 뿌연 백탁이 사라지지 않는 나의 눈동자.

글조각

무두질의 시간 25. 5.18 / 00:48

다가가야 한대도 그 다가가는 것을 어려워한다면 앞으로도 무엇을 이루기는 불가하다는 말과 같다. 군중 속에서 나는 다시금 웅크린다. 내 존재의 필요성이 옅어지는 순간이다. 별일 없던 몇 달은 본인을 나아가게 하기는커녕 고약한 속내를 한차례 끓여 응어리지게 할 뿐이었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또 다른 거죽을 한 꺼풀 뒤집어쓸 뿐이다. 이제는 여분의 거죽조차

글조각

먼지 25. 3. 8 / 00:08

우울은 마치 먼지와도 같아서 아무리 떼어내려 하여도 몇 개의 조각은 항시 붙어있기 마련이다. 우울이 먼지와 다른 점은 좀처럼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조그마한 그것이 누르는 무게는 실로 상당하다.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든지 깔아 누르려는 무시무시한 공포. 나는 그것을 참 두려워한다. 그리고 녀석이 조만간 찾아오려 한다는 것을 느낀다. 찬장의 컵들이 달그락거린다.

하루 일기

끊임없는 한쪽을 찾는 여정 24.12.18 / 22:34

오래전 그리고 근래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쪽이 없음을 당연시했다.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보서라도 혹은 성격상의 이유로라도 말이다. 하나 최근 들어 그 생각이 미묘히 일탈을 하기 시작했다. 자꾸만 목이 마른 사막의 모래에 내 마음을 비유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가치관의 변화인지는 모르겠다. 알 수 있는 사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 그리고

하루 일기

스물의 끄트머리 24.12. 4 / 21:26

12월은 다음이 없다.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달이다. 나는 아직 여기에 머무는데 말이다. 나이라던가 경험이라는 것들은 쌓지지만 그것이 꼭 시간과 비례하지는 않기에 다른 이들과 나는 조금씩 아니, 꽤 큼직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중이다. 수많은 초침들이 지나간 후 보일 미래는 여전히 미지수이나 내 모습이 환하게 웃기를 바란다. 비록 끝없는 바닥을 향해 머리를